티스토리 뷰
펜을 손가락 위에서 돌렸다. 진료중에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이 때 만큼은 자제가 되지 않았다. 초진기록지를 흝어내려가면서도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은 같은 곳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며 억지로 우겨넣기에 바빴다. 사실 별다른 특이사항 같은 것은 없었다. 이름이 윤정한이라는 것 말고는.
"가능한지가 알고 싶어서 왔어."
그는 날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다. 이런 환자는 가끔 있었다. 동요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펜을 돌리는 속도는 여전히 일정했다. 마음속에 차오른 분노와 긴장이 연필을 돌리며 일정이나마 해소되는 충동의 조절. 뭐 그런거였다. 삼촌. 삼촌을 생각하자 연필이 굴러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뇌의 기질적인 병변이나, 신경학적인 이상만 배제된다면 고려 해 볼 수 있겠어요."
"말을 어렵게 하는군. 평소 환자한테 그렇게 설명하는 편인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비좁은 진료실에서 그나마 가장 좋은 의자에 남자는 다리를 꼰 채 편하게 기대 앉아있었다. 몸을 감싼 검은 수트의 셔츠 아래 마르지만 단단한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굽혀본적 없는 빳빳한 기세가 마치 그의 셔츠 카라같다. 마음 한 구석이 뒤틀려버리고 만다.
"검사 몇 가지만 하고 진행하도록 하죠."
"그건 지나치게 불친절하고."
니새끼 대가리에 고장난건 없는지 확인하고 나면 쳐 해주겠다는 거다, 물론 어디 하나 분명히 고장난 거 같으니 희망은 갖지마. 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그는 내가 평생을 기다리던 기회였다. 절대, 절대 그르쳐서는 안되는 복수의 기회. 사실 그가 생각보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나는 매우 당황한 참이었다.
나는 머리를 식히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기억이라는 것이, 실제 윤정한님의 뇌나 신경계의 병에 의한 것이 원인이라면 꿈치료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언제 쯤이면 알 수 있어?"
"모든 검사와 준비기간까지 합치면 일주일 정도면 될겁니다."
일주일. 그가 나지막히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는 성격이 매우 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후미진 개인병원을 알아서 찾아온 만큼 그는 한달이어도 군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장 진행하지. 이 정도도 못기다릴까."
"일단 그러면 오늘은 병력청취와 간단한 검사부터 하겠습니다."
"좋아."
기다리는거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어.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은 무시했다. 이세상 모든 사람이 기다릴 수 있는 일 하나에도 펄펄 뛸것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초진기록지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문진을 했다. 어릴적 앓던 신체적 질환이 있었나요? 없어. 옛날부터 앓고 있거나 치료받은 정신과적인 질환은요? 없어. 어릴적 수면과 관련된 문제는 없었나요? 없어. 현재 수면에는 이상은 없나요? 없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당장 시행할 수 있는 몇가지 지필 검사를 거친 후 마지막으로 그의 기억에 대하여 간단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껏 아무런 병력이 없다고 했던 거짓말과 모순된다 해도 그의 기억상실은 아마 스트레스로 인한 해리성 기억상실증 이라는 진단 하에 별 다른 치료 없이 지냈을 것이다. 그에게서 지금 필요한건 찾으려는 기억에 대한 목적이다.
"잃어버린 기억이라는 건 언제의 기억입니까?"
"12살 때 일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의 기억이지."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날은.
"..........."
"뭐 그런 눈으로 쳐다볼 거 없어. 내가 훗날 멀쩡하게 상속 받아낼 만한 사람으로 만드는데만 온 신경이 쏠려있던 작자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했다. 쓸데없는 회상을 하며 나는 몸이 울릴정도로 뛰는 심장이 들키지 않도록 자세를 자연스럽게 바꿨다.
"분명 나는 그 때 같은 곳에 있어서 경찰 조사까지 받았어. 하지만 기억나는게 전혀 없더란 말이지. 그 때만 도려내간 것 처럼 아주 말끔해."
아프게 뛰는 심장이 서서히 차게 식는다. 기억이 없다고? 삼촌에 대한 기억도 없는 것인가? 하지만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은 지금 그에게 물어봐야 하는 질문과는 달랐기 때문에 마음에 묻어둘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알고 싶은 건가요?"
"그런 셈이지. 뭐 찾아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시덥잖은 이유는 아니고. 지금 난 상속을 앞둔 입장인데 주변에서 누가 살살 긁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그게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버지가 겪던 것과 지나치게 비슷하거든."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꿈 치료로 되찾고자 하는 기억이로군요. 이건 중요한 점입니다."
"물론 더 개인적인 이유도 있어."
남자의 눈빛이 짙어졌다. 내가 처음부터 줄곧 알고자 했던 것이라 또 다시 긴장감이 가득 찼다.
"......."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 차차 알려주도록 할게."
순간 어이가 없어져 멍하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에 굴하지 않고 남자는 기분 나쁜 미소로 씨익 웃더니 겉옷을 챙겨 진료실을 떠났다. 멱살을 붙잡고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외칠 새도 없이 다음 환자가 들어왔다. 성격 급한 외래 데스크가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
외래가 다 마무리 되고나서야 나는 제대로 된 감상에 잠길수있었다. 옆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쓸어넘겼다. 물이 뚝뚝 가운에 떨어졌지만 닦지 않았다. 세면대를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삼촌.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오고 말았어요.
삼촌의 장례식에서도 흘리지 않은 눈물이 자꾸만 터져나와서 나는 다시 물을 틀고 얼굴을 닦을 수 밖에없었다. 추울 때 마다 삼촌이 타주던 코코아가 먹고싶었다. 삼촌이란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12살의 소년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어려서는 안됐다. 미안해 삼촌. 나는 또 다시 마음에 삼촌을 묻었다.
30분 전 원우와 통화를 했다. 원우야. 그 남자가 왔어. 우스꽝스럽게 삑사리까지 난 내 목소리에도 원우는 웃지않았다. 갈게. 더 이상의 질문도 말도 없이 움직여주는 원우가 고마웠다.
나는 처치실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꿈 치료를 받는 아주 소수의 환자들을 위한 방이었다. 안에는 두개의 간이 침대와 모니터와 드림워커가 있다.
드림워커(Dream walker)는 유치한 네이밍이지만 말 그대로 꿈속을 걷게 하는 장치다. 치료자가 환자의 꿈속을 걷는 꿈요법은 이미 삼촌이 행하던 것이지만 안정성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치료를 지속하며 변화를 보기 위한 증거로 남길만한 것이 마땅히 없었다. 그것을 보완한 것이 이 드림워커였다.
공학적인 지식이 전무했던 나한테는 같이 일해줄 엔지니어가 필요했고 그 때 나타난게 원우였다. 다행히도 원우랑은 일 진행하는 방식도 잘 맞는 편이었다. 일 적으로도 능력이 출중하기도 했고. 지난 몇년간 우리는 드림워커의 구현에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재미없는 설명이지만 조금 덧붙이고자 한다. 수면에는 REM수면과 non REM수면이 있다. 이 두 수면은 90~100분 간격으로 되풀이된다. REM수면이 흔히 알려진 대로 꿈을 꾸게 되는 수면이다. non REM수면은 4가지 단계로 구성되어있다. 1단계에서 시작해 각성에서 수면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여 4단계로 갈수록 수면은 더욱 깊어진다. 이 수면의 깊이와 종류는 뇌파 분석으로 구분 가능하다.
깊은 수면은 수면의 전반부에서 주로 나타나고 수면의 후반부로 갈수록 적어진다. 수면 전반부에 나타나는 첫 번 째 REM수면은 매우 짧지만 수면 후반부로 갈수록 더 길어진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REM수면의 지점들은 수면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제대로 평가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수면의 깊이, 그리고 사람의 무의식의 단계를 교차시키면 일종의 좌표값이 나온다. 나와 원우가 가장 먼저 목표했던 것이 이 좌표값을 이용해 사람의 꿈을 영상으로 출력하는 것이었다. 마냥 뜬구름 잡는 농담같은 일을 실현해낸 원우는 정말로 천재였다.
꿈을 영상으로 출력한 덕에 치료자와 환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위험한 상황에서 각성상태로 바로 이끌어줄 감독자의 역할을 만들수 있게 되었다. 꿈치료의 안정성을 끌어올릴수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삼촌에게 이런 방어장치라도 있었더라면. 드림워커의 개발과정을 떠올리면 하루하루 삼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며칠간 잠못자고 피죽하나 못먹고 일하던 때 보다 더.
어쨌든 그렇게 나와 원우의 영혼의 결실이라고 부를만한 역작이 탄생했다. 이름은 드림워커라고 하고싶어. 언젠가 복잡한 도면을 읽어내려가던 원우에게 가볍게 던져봤는데 원우는 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 좋네. 나름 오래 고민하다가 말해본 건데 쉽게 나온 동의에 맥이 빠지면서도 안심이 됐었다. 원우는 정말 좋은 친구였고, 동료였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괜찮아."
꿈치료 계획이 잡히면 언제나 넉넉잡아 일주일전에는 불렀었는데 이번엔 상황이 상황인지라 당장 도움을 요청할수밖에 없었다. 원우는 필요한 말과 질문 외에는 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나는 더 수다스러워지곤 했다. 오늘은 미안한 마음에 나는 더더욱 수다스러워 졌다. 밥은 먹었는지, 요새 진행중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는 잘 되어가고있는지, 게임을 할 시간은 있는지. 귀찮을 법 한데도 원우는 하나하나 대답해가며 드림워커의 세팅을 시작했다.
"괜찮겠어?"
안경너머의 원우의 눈이 내 눈에 똑바로 마주친다.
원우야. 사실 너무 두려워. 자신이없어.
"괜찮을거야. 아니, 안 괜찮아도 해야지."
"조심해."
"응. 고마워."
하지만 해야했다. 나는 머리에 뇌전도를 붙이고 침대에 누웠다. 평소 밤샘이 잦은 원우에게 밤샘을 시키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원우는 모니터를 세팅하고 의자에 앉았다. 개발 초기에 각자의 꿈으로 실험을 해가며 프로그램을 개발했었다. 처음에 내 꿈으로만 시도했을때는 완전히 실패한줄만 알았다. 사실은 성공했다는 사실은 원우의 꿈으로 시도했을때 알았다. 그 때 이후로 내 꿈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잘 자."
"응."
피로해진 눈꺼풀을 내리고 잠을 청했다. 수면제 없이도 피로한 정신 때문에 곧 잠이 들었다.